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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2-22 00:11
무등산 극찬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993  
무등산 극찬… 신령한 이름 서석을 몰랐구나
■ 정홍명 '서석산부'
정유철의 무등산 이야기


"신선이 노니는 꿈이 실현된 듯/하늘이 만든 빼어난 것 모였네/아! 식견이 좁은지라/신령한 이름 서석(瑞石)을 몰랐구나/아름답구나, 서석산이여!/주현에 웅장하게 서려 있고/우주에 아름답게 솟아 있네/흙이 없어서 민둥산이고/빛을 머금었으나 파리하구나/멀리서 바라보면/붕새가 푸른 하늘을 지고 부리를 추켜 올린 듯/가까이서 살피면/ 학이 상서로운 구름을 뚫고 외로이 울고 있는 듯 하네/ 쭉 뻗어 있고/ 솟아오르고 굽었으며/산비탈엔 돌무더기 쌓였고/산언덕은 넓고 평평하며/ 영초가 우거졌고/ 감목이 번식하네/ 진귀한 새 날아내리고/ 괴이한 짐승 굴속에 사네/ 오나라 촉나라의 아름다운 경치 겸하였으니/좌사의 삼도부, 양웅의 감천부의 자랑보다 뛰어나네/"

신령한 이름 서석산, 우주에 아름답게 솟아있고 붕새가 푸른 하늘을 지고 부리를 추켜 올린 듯하며 학이 상서로운 구름을 뚫고 외로이 울고 있는 듯하다 했다. 서석산, 무등산을 이렇게 예찬한 이가 누굴까. 조선 중기 문인 정홍명(鄭弘溟, 1592~1650)이다.

정홍명은 선조25년에 태어나 자는 자용(子容), 호는 기암(畸庵) 또는 삼치(三癡)인데 나중에 기옹(畸翁)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송강 정철(鄭澈)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 강항(强項)의 딸이다. 이런 인연이 있으니 정홍명은 '서석산부'(瑞石山賦 )를 지어 서석산의 아름다움을 극찬하였다.

정홍명의 문집 '기암집'(畸庵集)권지구(卷之九) 부사(賦詞)에 '서석산부'가 실려 있고 식암(息菴) 김석주(金錫胄, 1634~1684)가 펴낸 '해동사부'(海東辭賦)에도 들어있다. 사부는 운문이지만 내용은 산문의 성격을 가진 특이한 문체이다. 산문인데 시처럼 운율이 있다 말할 수도 있다. '해동사부'는 이관성 등이 번역하여 2008년 보고사에서 출판한 덕분에 한글로도 읽을 수 있다. 원문을 읽지 않고 번역문만 접하여도 정홍명이 무등산을 얼마나 칭송했는지 알 수 있다.

"자꾸 말하면 속이는 것 같고/누추하다 하면 취할 것이 없네/그저 바라보니 높고 험한 꼭대기/깎아지른 낭떠러지/기이한 바위, 사람처럼 서있고/ 괴이한 돌 짐승처럼 기울었네/섬세히 큰 도끼로 자르고/공교히 조각한 듯하며/ 팔천 척 유독 빼어난데/삼층으로 치고 잘랐네/아래도 볼 수 없이 우뚝 솟아서/자로도 잴 수 없네/기둥을 지탱하고 있는 형세 편안하지 않고/거센 회오리바람이 일어 옆으로 기울었네."

서석대ㆍ입석대의 기암괴석을 말하는 내용인 듯하다. 큰 도끼로 섬세하게 자르고 빼어난 난 솜씨로 조각을 한 듯하다고 했다. 이런 아름다운 산에 오르면 세상 근심은 절로 사라진다.

"향기로운 난계를 거슬러 올라가니/단풍나무와 대나무 아름답네/늘어진 넌출 잡고 기어올라/가파른 봉우리를 오르며 멀리 바라보니/한 잔에 사해를 뜨고/마음에 만상을 담네/구름을 타고 멀리 갈 생각을 하며/가슴 가득한 어리석은 번민을 쓸어버리네/남쪽으로 기호지방 돌아보니/섬들은 엉기어 돌고/내와 길은 아득히 작네/소요하며 두루 살펴보니/ 가리키는 곳 그곳이 어딘가?"

힘들게 올라 사방을 바라보며 산 아래 구름을 보니 신선이 된 듯하다. 올라올 적 가슴에 가득한 번민은 한순간 씻겨 내려간다. "저 금강산이 가장 아름답고/묘향산이 웅장함을 자랑하나/ 빼어난 형세 모인 바요/ 감상하며 노닐기엔 매 한가지라/신선과 노닐고/영랑이 노니는 것같네/ 없는 것 부려서 있는 것처럼 하고/거짓을 늘어놓고 망령되어 전하면/비록 부족한 선비는 믿더라도/영준한 선비는 구경 가지 않으리/그 나머지는 치우치고 거칠며 편벽된 땅/끊어진 먼 땅으로/산은 신령스럽게 높지 않고/물은 맑고 곱지 않네/문인의 눈과 귀를 빌려/지금과 옛날의 책에 적었으니/사실을 기록하고 아름다움을 칭송한 것이라도/모두가 이 산의 특별한 것만 못하네"

이런 경지를 우리는 언제 느껴 볼 것인가. 계곡(谿谷) 장유(張維 , 1587~1638)는 '서석산부 뒤에 제함'(題瑞石山賦後)이라는 글에 이렇게 썼다.

"기암자(畸庵子) 정홍명은 체격도 작은 데다 병에 많이 시달려 언뜻 보면 초췌하고 왜소한 하나의 남자에 불과할 뿐인데 그가 지은 '서석산부'(瑞石山賦)를 보니 광대하고 기걸차고 탁절(卓絶)하고 엄려하여 그 토해 내는 기염이 무시무시하기만 하였다. 재자(才子)는 참으로 헤아릴 수가 없는 법, 이로 인해 상쾌한 느낌을 갖게 되다. 기옹(畸翁)의 글을 보건대 소작(小作)의 경우는 대부분 소루하고 느슨하여 묘한 경지에 이른 것이 드문 반면 그 웅사(雄詞) 대편(大篇)을 보면 기걸차서 남의 추종을 불허하니 그는 대체로 크게 쓰는 데에는 능하고 작게 쓰는 데에는 재주가 모자란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를 만약 하늘로 날아오르고 물속에 잠기는 등 대소의 변화를 측량할 길이 없는 신룡(神龍)과 비교한다면 물론 조금 양보해야 할 점이 없지 않겠지만 고래가 땅덩어리를 집어삼키고 자라가 삼신산(三神山)을 내던지듯 하는 면이 있어 또한 일세지웅(一世之雄)이 되기에 충분하니 아, 대단하다 하겠다."

정홍명은 어려서 송익필에게 글을 배우고 약관에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주역''근사록' 등을 배웠다. 김장생의 아들 집(集)은 그를 중히 여겨 국사(國士)로 대우하였다. 광해군 8년 (1616) 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보임되었으나 대북(大北)의 견제를 받자 고향으로 돌아가 독서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반정이 일어나니 인조1년(1623년) 예문관검열을 거쳐 홍문관의 정자ㆍ수찬이 되었다. 이괄(李适)의 난 때는 공주까지 왕을 호종했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억지로 나왔다가 돌아갈 때 다시 대사헌ㆍ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650년세상을 떠나니 창평 당지산 선영에 장사 지냈다. 총명이 뛰어나 제자백가서에 두루 통하였다.고문(古文)에도 밝았으나 김장생의 영향으로 경전(經傳)을 으뜸으로 삼았고 예학에도 밝았으며 김장생의 학통을 이었다.논설위원 ycjung@jnilbo.com.
출처:전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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